■ 119 신고까지 1시간 44분, 그동안 무슨 일이?
'안전제일주의'를 내세우는 강남의 한 성형외과. 지난 5월 27일, 여기서 성형수술을 받은 20대 청년 A 씨가 아직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술이 잘 끝났다'는 말만 믿고 있던 가족들은 불과 하루 뒤 '의식이 없다'는 대학병원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가족들은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당시 119 구급활동일지에는 '건물 1층 문이 잠겨 환자접촉까지 시간 지연'이라 적혀 있습니다. 사고 당시 병원에 있었던 직원은 간호사 단 한 명. 심정지가 온 A 씨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던 도중, 문을 열어 주기 위해 2분가량 자리를 비운 겁니다.
게다가 당시 A 씨를 돌보던 간호사에 따르면 환자는 오후 9시부터 호흡곤란을 호소했는데 119에 신고한 건 밤 10시 44분입니다. 이상 증상을 확인하고부터 신고까지 1시간 반이 넘는 시간, 어떤 처치를 했는지 가족들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 CCTV, 없거나 안 찍혔거나 못 주거나
대체 1시간 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가족들은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병원에 CCTV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야 '사라진' 1시간 반 동안 의료진이 A 씨 곁을 지킨 건지, 119 출동 과정에서 얼마나 시간이 지연된 건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수술실 내부 CCTV는 있지만, 따로 녹화하지 않았고, 회복실에는 아예 CCTV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복도를 비추는 CCTV가 있지만 제공할 수 없다는 게 병원 입장입니다. 개인정보보호법은 CCTV에 나온 사람들이 모두 동의할 경우 영상을 볼 수 있게 했는데, 이 병원 의료진들이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가족들이 확인할 수 있는 건 의무기록뿐입니다. 모든 병원은 의무기록을 보관해야 하고 환자가 요구할 경우 제출해야 합니다. '의료행위의 적정성 여부를 판단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해야 합니다.
■ 받을 때마다 달라지는 의무기록
하지만 의무기록은 더 실망스러웠습니다. 병원에서 몇 시간씩 기다려서 받은 건데도, 상담일지와 수술 동의서 같은 기본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도 지방흡입술은 수술기록과 마취기록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안면윤곽술의 수술 기록지는 텅 비다 싶을 만큼 별 내용이 없었던 겁니다. 이 병원 관계자는 본인이 여러 성형외과에서 일해 봤지만, 수술 기록을 적는 곳은 단 한 곳도 보지 못했다는 황당한 해명을 내놨습니다.
하지만 A 씨의 가족들은 가장 분노하게 한 건, 심정지가 일어나는 순간까지 머물렀던 회복실의 기록지입니다. 각기 다른 시기에 제출된 회복실 기록지 3부를 분석해 봤습니다. 사고 직후에 받은 기록에다가, 사고 이틀 뒤에는 '미다컴(진정제)'이, 사고 한 달여 뒤에 받은 기록엔 '세포졸(항생제)'까지 추가돼 있습니다. 같은 날 같은 사람에 대해 작성된 건데, 내용이 모두 다른 겁니다. 병원 측에서 의무기록을 제출할 때마다 수정해서 내놓은 겁니다.
이 기록지를 작성한 간호사는 "나중에 다시 기억이 나 추가해서 적었을 뿐"이라고 해명했습니다.
■ '큰돈 들여지는 싸움', 입증책임은 환자에게
결국, 가족들은 길게는 몇 년씩 걸릴 법적 대응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막막합니다. CCTV 영상을 확보하는 덴 실패했고, 그나마 받아 본 의무기록은 그때그때 바뀌어 어떤 게 진짜인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A 씨 가족들은 "CCTV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그나마 확보한 의무기록으로 싸워야 하는데, 이런 기록을 갖고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모르겠다"며 "우리가 증명할 수 없는 걸 병원 측에서 아니까 더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것 같다"며 한숨 쉬었습니다.
가족들의 말대로 의료사고의 과실 입증책임은 환자 측에 있습니다. 의료행위에 대한 전문지식이나 자료를 보유한 건 의료진 측이기 때문에 환자로서는 쉽지 않은 길입니다. 민사 소송 1심 판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26개월인데, 환자 측 4명 중 1명 만이 일부라도 승소할 수 있습니다. 의료소송에 대해 '큰돈 들여지는 싸움'이라는 냉소 어린 비유가 나오는 건 이 때문일 겁니다.
■ 의사협회, "의료진 범죄자 취급"
이렇다 보니 의료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수술실 CCTV 의무화'가 쟁점이 됩니다. CCTV가 모든 의료사고 밝힐 수야 없겠지만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자, 최후의 입증 수단이 될 수는 있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찬성 여론이 압도적입니다. 보건복지부의 2018년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4.4%가 수술실 내 CCTV 의무화에 찬성했습니다. 의료사고 뿐 아니라 대리수술, 수술실 내 성폭력 문제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의사협회는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CCTV 촬영을 의식한 채로 수술을 진행하면 최적의 의료행위를 하기보다 문제의 소지를 없애기 위한 소극적 진료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실제 수술실 CCTV 의무화를 시범 운행 중인 경기도의료원에서도 시행 초기에는 의료진이 수술을 꺼려 수술 건수가 줄어들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완전히 기우는 아닙니다.
의료진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한다는 것에 대한 반감도 작용합니다. 이동욱 경기도 의사회장은 "대부분의 선량한 의료인들은 최선을 다해 수술에 임한다"며 "CCTV를 설치한다는 건 의료진을 잠재적 범죄자, 수술실을 잠재적 범죄 장소라는 인식을 확산시킨다"고 우려했습니다. 의료진과 환자 사이는 기본적으로 신뢰 관계이지, 견제와 감시의 관계가 아니란 겁니다.
■ '기울어진 운동장', 최후의 카드
그런데 찬성하는 측은 도리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CCTV 의무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수술실에서 CCTV를 운영하는 경기도의료원의 정일용 원장은 "일부 의료진의 잘못된 행동으로 의료계 전반이 신뢰를 잃었다면, CCTV 설치를 통해 대부분 의료진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의료진과 환자 사이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환자가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카드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일차적으로는 수술실에서 일어나는 명백한 불법행위를 막을 수 있고, 이차적으로는 의무기록이 부실하거나 허위로 기재됐을 때를 대비해 CCTV 시간과 맞춰보는 방식으로 의무기록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도는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상 유출 등 보안에 대한 우려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정일용 원장은 "경기도의료원의 경우 영상 유출 등 보안 우려에 대해서는 열람 권한을 여러 단계로 나눠 최종적으로는 의료원장의 동의까지 필요하도록 장치를 만드는 방법으로 해결했다"고 말했습니다.
의료계 자율에 맡겨두면 된다는 주장에 대해 병원으로서는 CCTV 설치에 대한 이점이 없는 만큼 법제화가 필요하고 대신 설치비용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식의 대안이 나옵니다. 또 영상 유출 등 우려에 대해서는 접근 권한을 여러 단계로 나눠 열람을 제한하는 등 장치도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출처 :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494630&ref=A